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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 꼭 하루 뿐인 특별한 날 2
acowa
2009. 2. 13. 00:49
생일을 응급실에서 맞이하는, 평생 있을까 말까 한 경험을 했다는 것에 대한 알 수 없는 뿌듯함까지 얹어서, 내 스물 여섯의 생일은 그렇게 또 하나의 잊지 못할 에피소드가 되었다. 생일 하루 전, 선물처럼 당첨된 시사회에 언니와 모처럼 기분 좋게 갔다가, 영화 보는 도중에 갑자기 몸살기운이 밀려 들어 안절부절 하면서도 끝까지 자리를 뜨지 못했다. 내가 좀 그렇다. 아파도 적당하면 참는다고 해야하나, 이건 미련한건지, 아니면 고집인건지. 여하튼 영화 시작 20분만에 시작된 그 몸살 와중에도 웃고 박수쳐 가며 재밌게 영화를 보고 나왔다. 나오자 마자 밀려드는 바람에 잔뜩 오한이 들어 몸까지 바들바들 떨려오고, 부랴부랴 지하철을 타고 몇 정거장쯤 지나니 슬슬 입에서 신음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환승역에서 지하철을 갈아 타려다 도저히 한 발짝도 걸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무작정 가까운 출구로 나갔다. 얼마 전 그날 밤의 신도림 역보다도 더 낯선 그 출구는 차도와도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주택가로 연결되어 있었다. 찬 바람을 더 맞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에 부지런히 뛰어서 큰 길까지 다다라, 겨우 택시를 잡고, 뻗었다.
집으로 와서 온도를 잔뜩 올리고는 옷도 못 갈아 입고 누웠는데, 이건 아무리 봐도 몸살이 아닌거다. 두통과 고열, 근육통은 일반적인 몸살 증상이었지만, 이건 아무리 봐도 몸살치고는 좀 심했다. 몸살정도로 응급실가서 호들갑 떨어봤자 라는 생각에 집으로 온건데, 아니었다. 늘 그렇듯 극으로 치닫을 수록 자신조차 놀랄만큼 냉정해져서, 오겠다는 언니를 기다리는 것 보다 한 시라도 빨리 택시를 잡아타고 병원으로 가는 편이 낫겟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부리나케 일어나 집을 나섰다.
응급실이란 곳이 원래 그렇듯이, 제 발로 걸어들어온 환자는 푸대접일 수 밖에 없다. 더군다나 도무지 환자라기 보다는 병문안 온 방문객 마냥 리본달린 옷에 또각 또각 구두까지 신고 온 여자는, 얼굴이 아무리 사색이 되어 있더라도 나몰라라 할 수 밖에 없겠다 싶긴 했다. 애들이란 원래 그렇게 치고 박고 싸우고 넘어지고 다치는게 일이라 쳐도, 이름도 민망한 '경환자실'에는 나 빼곤 전부 어디가 찢어지거나 깨져서 온 애들 뿐인데, 그 중에서도 피 한방울 안 흘리고 있는 나는 가장 덜 응급한 환자로 분류되었는지, 벤치에 널부러져 있기를 한참이 지나서야 어디가 아프냐는 질문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고 얼마쯤 지나자 병원에서 보호자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도착했고, 서 너 가지 검사를 하고, 링겔을 꽂고 나서야 응급실 한 쪽 침대를 배정 받았다. 응급실 침대라는 것이 얼마나 귀한 자리인지를 잘 아는 까닭에, 자리에 누웠을 때는 고마운 마음과 안도감에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열 두시가 지나 내 스물 여섯 번 째 생일. 고맙게도 나를 기억해주는 사람들의 문자가 하나 둘 도착할 때 쯤엔 놀랄만큼 통증이 가라앉아, 간간히 미소를 짓고 이야기도 할 수 있을 만큼 정신이 들었다. 올 해 생일은 응급실에서 맞는 구나 - 하고 생각하니, 묘하게도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어 웃음까지 나왔다. 열 두시가 지나자 마자 축하해주려는 엄마의 전화는 응급상황을 들킬것이 염려되어 미안하게도 받지 못했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은 기억인데-. 그렇게 생각하는 내가 어이없어 또 웃음만 나왔다.
요란을 떨고 집에 와서 회사도 제끼고 한 숨 푹 자고 나니 살아 돌아다닐 만큼은 되었다. 결국 원인을 못찾아서 - 뭐 사실 경험상 응급실에 큰 기대는 안했다 - 한의원에 갔더니 역시나 먹은게 탈이었다. " 언짢은 상태에서 식사하셨나요? " 하고 묻는데 대답도 못하고, 또 멋쩍게 웃기만. 그 날 몸과 마음이 좀 놀랐긴 놀라있었다. 아니 그래도 탈났다고 이렇게 까지 아플 수도 있는건가, 한의사는 급체하면 죽을 수도 있다며 웃었다. ㄷㄷㄷ
주변 사람 걱정시키고, 내내 잘 있다가 생일 맞아 요란 피운것 같아 좀 미안하지만, 뭐 내 생애 꼭 하루 뿐인 특별한 날로 기억될 것임은 틀림 없지 않겠나 싶은게 나쁘지 않은거다. 그러고 보니 이번 생일은 사진도 한 장 못 박고 지나가버렸네, 그게 좀 아쉽긴 하지만. ㅎㅎ
역시 건강이 최고. 아, 그렇다고 내가 심히 병약하여 건강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건 단지 극심한 스트레스 였다구. 그나마도 이제 안녕. 이제 나는 또 다시 새로운 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