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hblah

토요일 단상 #2

acowa 2008. 8. 3. 01:57

 너무 길었던 일주일의 끝, 금요일을 기념하여 실컷 자기로 작정하고 초저녁 부터 잠을 청한 탓인지 오늘 아침은 개운 했다. 일어나자 마자 온 갖 재료를 꺼내서 월남쌈을 만들어 먹을 의욕이 생긴걸 보면. 아니면 그쪽으로는 워낙 의욕이 샘솟아 주시는건지도 모르겠고.

 혼자서도 밥은 잘먹는지라 라이스 페이퍼 10장을 가뿐히 해치우고 모닝샤워를 했다. 좋아하는 피아노 연주곡을 크게 틀어놓고, 샤워할때의 거품도 리드미컬하게. 그리고 새로산 아주 적당한 선명도의 빨간 매니큐어를 새로 발랐다.

 조금 뒹굴거리면서 책을 뒤적이다가, 음악을 듣다가, 집을 나서야 겠다고 결심하고 창밖을 보니 비가 온다. 오늘은 모자쓰고 흰운동화 신고 나가고 싶었는데, 틀려먹었다.

 4시간 후,
사람들이 너무 많아 도무지 우산을 쓰고서는 걸어가기 힘든 거리. 그 무리 속에서도 제일 작은 탓에 까치발을 한 채로 다른 사람들 보다 한뼘이나 우산을 높이 치켜들고는, 열심히 사람들 틈을 헤집고 다녔다. 배가 조금 고팠다. 생각해보니 아침에 일어나 월남쌈 먹고, 요플레 먹고, 과자 먹고, 복숭아 먹고, - 이렇게 보니 또 많이 먹긴 했다. - 점심을 못 먹었다. 뭘 먹지. 비를 피해 잠시 서 있는데 맞은 편 간판에 쓰인 문구가 낯익다.

' 30년 전통 멸치국수 전문점 '

 고등학교때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면 자주 가던 식당이 있었는데 그 집이 꼭 저런 문구를 써놨다. 그 집의 멸치국수 국물은 어찌나 기가막힌지 아침 등교길에도 생각이 날 지경이었다. 국수 한사발론 영 배가 안차던 시절이어 그런지 하루 걸러 하루 가다시피 자주 다녔고,- 그나마도 안간날은 고기국수를 먹으러...- 대학에 가서도 종종 들리곤 했다.

 내가 국수를 좋아하게 된 것은 엄마의 영향을 받아서이다. 엄마는 유독 국수를 좋아한다. 아니, 면요리를 다 좋아한다고 해야겠다. 나랑 시내에 나갈때면 엄마는 엄마가 여고시절 부터 다녔다던 분식집에 데려가서 냄비우동을 먹었다. 나는 늘 가서 다른 메뉴를 먹곤 했는데, 대학에 들어가고 난 후에는 냄비우동을 먹곤 했다. 그러고 보니 비가 오는 날이면 엄마는 늘 국수를 해줬다. 도무지 한 사람 양이라고는 볼 수 없는 양의 면을 넣어서, 종종 일본에 다녀온 후면 가쯔오부시가 들어가 우동인지 국수인지 분간은 안됬지만 맛은 있었다.

 3층에 위치한 국수집 계단을 올라갔다. 2층은 무슨 매운닭요리 집인가 본데, 사람이 바글바글하다. 비가 오니 국수집도 사람이 많겠지, 혼자 가는데 사람이 많은건 싫지만 오늘은 국수생각이 간절하다. 계단을 돌아서 3층 식당 문 앞에 들어서니 손님은 한 테이블 뿐이다. 그것도 이제 막 나가려는 참이다. 혼자가는데 사람이 많으면 어쩌나 했던 걱정은 어디가고 온 종업원이 나에게만 신경을 쓰겠구나 싶어 앉지도 못하고 한참 서있다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 이쪽으로 앉으면 시원해요" 하는 주인 아저씨의 말이 냉방병으로 고생하는 나한테는 과잉친절이 되어버렸다. 이자리가 좋다는 뜻을 담아서 웃을 듯 말듯한 표정을 한 번 짓고는 멸치국수를 부탁했다.

 오늘 기분 그런데 국수까지 맛 없으면 어쩌지, 하는 유치한 생각을 하다가, 내가 앉은 자리가 3면이 거울로 된 곳과 마주보는 자리라는 것을 깨닫고 흠칫, 놀랐다. 고개를 들면 3명의 내가 각기 다른 방향으로 놀라고 있어서 도무지 시선을 둘 곳이 없다. 이런 날은 하필 MP3 플레이어도 안 챙겨왔다. 지하철에 앉아서 책을 읽으려니 시끄러워 귀를 막으려고 이어폰을 꺼냈더니 달랑 이어폰만 딸려왔다.

 국수가 나왔는데, 뭐 이건...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국수라 함은 갖가지 고명은 물론이요 고기까지 들었으면 금상첨화인데, 그런건 다 관둬도 최소한 김가루나 깨가루 정도는 들었어야 하는게 아닌가. 청양고추를 몇 개 썰어 넣은 양념장 비슷한 것이 한 스푼 올려져 있는 국수가 낯설어 한참을 못 먹고 바라만 봤다. 국물을 한 숟갈 떠 넣으니 비가 와서 그런지 그래도 속이 뜨근한게 좋다. 그런데 너무 맵다. 청양고추라니, 웬말인가.

 배가 고프면 집에 못갈 것 같아 억지로 억지로 한 사발을 다 비워넣고는 서둘러 나왔다. 국수에 대한 향수와 배신감이 동시에 드는 바람에 뒤도 안돌아 보고 서둘러 계단을 내려왔다. 비가 조금 머뭇했다. 어떻게 할지 잠시 망설이는 동안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비가 많이 온다고 해서. 엄마랑 전화를 끊고나서 길을 나서니 문득 오늘 월남쌈을 먹은 것도, 피아노 연주곡을 들으면서 모닝샤워를 한 것도, 손가락 발가락에다 온통 새빨간 매니큐어를 칠했던 것도 효과가 없다.

 뭐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