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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새 취미

acowa 2022. 12. 4. 19:54

목디스크가 올 정도의 미친 독서에 이어 요새 꽂힌 일은 글쓰기다. 정확하게 말하면 만년필로 글쓰기. 처음에는 아침에 일어난 후 방어기제가 작동하기 전 45분동안 생각을 비워내는 Morning page를 하기로 마음 먹고, 이걸 꾸준히 하려면 글이 쓰고 싶을 만한 마음에 드는 노트와 펜을 구입해보라는 말에 옳다구나 만년필과 작은 노트를 들였다. 역시 장비의 힘이란 어마어마해서 만년필로 사각사각 글을 쓰고 있는 그 느낌이 좋아 쓸 말이 없는 데도 일단 노트를 펴고 아무말 대잔치를 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넉 달이 넘게 매일 일기를 쓰며 구입할 때 들어있던 카트리지를 다 쓰고 나니 카트리지 소모 속도가 감당이 안되겠다 싶어 병잉크를 사는 것이 경제적이겠다는 생각에 이르렀고, 그것이 나의 착각 나의 실수 마이 미스테이크였다.

자고로 잉크라 함은 블랙과 블루뿐인줄 알았는데 세상에…이 오묘하고 영롱한 잉크들 머선일이죠…!! 색감 초 민감하신 디자이너의 마음을 온통 홀려버리시고…카트리지 살 돈 아껴보겠다고 갔다가 ‘오 마이갓 텍 마 머니’가 된 것입니다. 인간은 실수를 반복하고 자신의 덕력과 장비병을 너무나 과소평가한 나새키는 그렇게 무릎을 꿇고 몇 시간을 홀려 구경하고 고민하다 이쁜 잉크를 하나 집어 왔더니 만년필은 샤프심 바꿔 끼듯 잉크를 바꿔 끼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요. 아 - 이래서 사람들이 만년필 하나 있는 데도 그렇게 여러 개를 더 가지고 있는 것이었습미다…덕후 앞에 한 없이 겸손해지는 깨달음의 순간. 이로써 열어서는 안될 문이 열려버린 것입니다.

이미 먼저 가신 분들의 훌륭하신 컬렉션을 보며 며칠 밤을 보내고 나니 그래, 그래도 끝까지는 가지 말자…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몽블랑엔 들어가지 않으리라 결심 하고 입문용을 하나 더 들이기로 합의. 이왕이면 예쁜 색감을 볼 수 있는 투명한 펜으로.

참 이게 뭐라고…펜을 사가지고 나오는 길에 너무 설레 집에 까지 가는 것도 기다릴 수가 없어 근처 도서관에 앉아 잉크를 채우고 두 시간 동안 글을 썼다. 그 시간이 얼마나 힐링인지, 만년필을 쓰고 싶어 생전 안하던 필사라도 취미로 해볼까 싶어지더라. 생각해보면 나는 너무 디지털한 삶을 사는 사람이었던 것. 이런 아날로그함이 필요했다. 그 어린 시절에도 이모들 LP를 몰래 꺼내 듣던 나인데 아이패드에 애플 펜슬로 그림을 그리는 취미를 삼아 볼까 했던 것이 영 되지 않았던 이유가 있었다. 디지털하고 첨단의 것을 생각하느라 지친 나에게 오래 걸리고 불편한 방식의 아날로그함이 필요하다는 깨달음. 실로 오랜만에 꽂힌 새로운 취미에 기쁘고, 설레고,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