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답게 늦잠이나 푹 자려고 맘 단단히 먹고 잤는데, 생각보다 일찍 깨고 말았다. 일어나 재미없는 토요일 오전 TV프로를 멍하니 누워 보다가 어제 읽다 잠든 책을 마저 다 읽고 늦은 아침을 챙겨먹고, 책을 또 두 권 더 읽었다. 허리가 아프려고 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오후 4시. 자리에서 일어나니 머리가 핑그르르 돈다. 약간의 빈혈이 있긴 하지만 최근엔 약을 꼬박꼬박 먹어서 좋아졌었는데, 아마도 기분이 좋지 않기 때문이리라.
사실 어제부터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아서, 그래서 맛있는걸 먹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냉장고를 한참 뒤적이다, 어제 소고기 얘기를 너무 많이 들어서일까, 냉동실에 언제 두었는지도 모르겠는 소고기가 보였다.더 늦기전에 먹어치워야겠네, 오늘은 어제 사온 굴소스로 찹스테이크를 만들어야지.
노란것 1/4,빨간것 1/4 파프리카를 썰어두고 양파는 씹히는 맛이 들게 큼직히 썰었다. 당근은 동글동글 얇게 썰어내고, 후추와 소금,약간의 올리브오일로 밑간을 해둔 고기를 먼저 볶다가, 전에 마시다 남은 와인을 살짝 둘러주었다.그리고 마지막으로 야채를 넣고 굴소스로 간을 해주면 끝.
보통 요리를 하다보면 냄새를 맡게 되서 입맛이 없어진다고들 하는데, 나는 반대인것 같다. 손이 큰편이라 보통 했다하면 3인분씩인데, 오늘은 신경써서 조금만 했는데도 1.5인분은 족히 되었다. 그래도 순식간에 다 해치웠다.
배부르게 먹고 났으니 운동을 좀 해야겠다 싶었다. MP3에 음악을 몇 개 골라담아 넣고는 새로산 하얀 운동화를 신고 밖을 나서니 기분이 날아갈 듯 했다. 못보던 새 오피스텔 맞은 편에 근린체육시설이라는게 생겼다. 짧은 조깅트랙과 농구장 테니스장 배드민턴장 등이 있는데 바로 집앞이라 저녁에 가볍게 운동하기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오늘의 목적지는 안양천이므로 패스.
날이 풀려서 그런지 사람 한 명 안다닐것만 같은 황량한 안양천에도 사람들이 꽤 많았다. 지난해 가을이던가 설레는 마음으로 안양천에 와보고는 날파리떼만 잔뜩 보고 실망을 한 뒤론 와 본적이 없었는데, 못보던 새 안양천도 여기저기 단장을 해서 썩 산책할만한 곳이 되었다. 산책로와 자전거 도로를 구분해놓고 여기저기 벤치며 가로등, 간단한 운동기구도 새로 생긴듯 했다. 다들 뛰거나 자전거를 타거나 했는데 나 혼자 음악까지 들어가며 천천히 느릿느릿 걸었다. 군데 군데 김밥까지 싸가지고 나와 먹는 가족도 있었다.안양천에도 이런 풍경이 있다니, 내가 다 뿌듯할 지경이다. 밥을 잔뜩 먹었는데도 맛있어 보이는건 아마 온 가족이 둘러 앉아 먹는 모습때문이겠지, 조금 외로워지는 기분이었다. 얼마후면 집에 가니까, 괜찮다고 생각한다.
어릴 적 아빠는 퇴근시간이 땡하기 무섭게 나타나는 군인 출신이었다. 으레 아빠가 퇴근할 무렵이면 엄마는 간단히 먹을걸 챙겨두었다 아빠가 오면 옷만 갈아입고는 여기저기 많이도 놀러다녔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내가 6학년이 되던 무렵인가 부터는 엄마 아빠도 바쁘고 나도 더 이상 어른들을 따라다니는 것에 재미를 느끼지 못했던 탓인지 그런 일이 부쩍 뜸해졌다. 그 이후로야 당연 친구들과 노느라 정신이 없었고...,이제 나이가 조금 들어 20대 중반이 되고 나서야 다시 부모님과의 시간을 그리워하게 되는구나. 부모님 생각만 해도 눈시울이 젖는다는 어른들의 말이 이제서야 와 닿는다.
걷다보니 너무 멀리까지 가버렸다. 두 시간 정도 걸었더니 배가 꺼졌음은 물론이고 목이 탔다. 집에가서 사과라도 먹어야지.
아침에 일어날 무렵엔 기분이 너무 좋지 않아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역시 밖에 나와 움직이고 나니 좀 가벼워졌다. 내일은 조금 더 일찍 일어나 서점에 다녀와야지.
남들은 다 놀러가느라 바빴던 어느 우울한 토요일. 오늘을 기억하고 싶어서 몇 자 끄적.
blahbla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