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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사는 세상 그래도 성급해선 안된다. 지금 이순간 내가 할일은 지난 사랑에 대한 충분한 반성이다. 그리고 그렇게 반성의 시간이 끝나면 한동안은 자신을 혼자 버려둘 일이다. 그것이 한없이 지루하고 고단하더라도 그래야만 한다. 그것이 지나간 사랑에 대한, 다시 시작할 사랑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지도 모른다.
17세의 나레이션 감정을 가지는게 무서워. 기껏 길들여진 뒤 돌아오는 것은 왜 상처와 자기모순일까. 길들임의 행복은 너무 금방 끝나는 느낌이야.
미소가 떠올랐던 평범한 순간들 그를 위해 정말 좋은 사람들을 사귀어 놓고 그를 위해 맛있는 식당들을 알아놓고 그와 이야기하기 위해 책을 골라 읽고 영화도 보아두고 철새와 뱀과 고래와 사슴벌레의 습성들에 귀 기울여둔다. 그를 위해... 잎지는 가을 숲길과 칠월의 가로수가 그늘을 드리운 시골 국도를 발견해놓고 배들이 섬으로 떠나는 항구의 시간표를 알아놓는다. 그를 위해 내 일기장을 정리하고 사진들을 연대순으로 꽂아놓고 지도위에서 그와 함께 갈 먼 나라들의 순서를 정한다. 그를위해. 어쩌면 다음생에서 만날 그를 위해,
키친 나는 이제 이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 시시각각 걸음을 서두른다. 시간의 흐름은 막을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다. 나는 갑니다. 한 차례 여행이 끝나고, 또 다른 여행이 시작된다. 다시 만나는 사람이 있고, 만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나도 모르게 사라지는 사람, 스쳐 지나가는 사람. 나는 인사를 나누며 점점 투명해지는 듯한 기분입니다. 흐르는 강을 바라보면서,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저 어린 시절의 흔적만이, 항상 당신 곁에 있기를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손을 흔들어주어서, 고마워요. 몇 번이나 몇 번이나, 흔들어준 손 고마워요.
하얀 강 밤 배 다만 한가지, 이사랑이 외로움 덕분에 유지되고 있다는 것은, 내내 알고 있었다. 빛처럼 고독한 이 어둠속에서 둘이 말 없이, 저릿한 마음을 떨치지 못하는 것. 그것이 밤의 끝이다.
빵빵빵, 파리 페이지를 넘겨요. 이미 지나간 일은 돌아보지 말고, 현재에 머물지도 말고, 페이지를 넘기라고. 지금의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스스로 페이지를 넘기는 것 뿐이라고. 페이지를 넘기는 일은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지 않느냐고 그리고 그 페이지를 새롭게 써나가라고. 앞으로 펼쳐질 아름다운 이야기를 써나갈 수 있는 것은 바로 자신이라고.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다시 꿈꿀 수 있고, 다시 시작할 수 있고, 다시 뛸 수 있고, 그리고 고통에서 벗어나 꿈을 향해 달려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고. 삶은 뜨거운 것이고 살아봐야 삶이 되는 거라고. 그러니 페이지를 넘기라고.